에디터 안재훈
‘세한도(歲寒圖)’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시절, 그러니까 1844년에 유배당한 스승을 위해 멀리서나마 섬김의 정성을 아끼지 않았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을 위해 그렸다는 그림이다. 학창 시절, 나는 교과서 속에 나오는 세한도를 보면서 왜 이 그림이 국보 제 180호로 지정될 만큼 대단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공간이란 정중동의 힘을 가진 곳
볼품없이 앙상한 소나무 사이에 쓸쓸하고 초라한 집 한 채, 유배생활의 고단함이 추운 날씨로 표현되어 그려진 것이 그림의 전부다. 내 기억 속의 선생님께서는 세한도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극찬의 내용이라는 것이 실제로 세한도를 통해 선생님이 받으신 감동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전문가들에 의해 정리된 형이상학적 단어 나열의 인용이라는 인상을 받았을 때, 세한도에 대한 나의 관용은 조금도 자리 잡을 틈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지금 대하는 세한도의 적막함과 무심함은, 여유 있게 하늘 한번 쳐다보기가 벅찬 바쁘고 복잡한 나의 일상과 마음을 동하게 만든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계적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의 특징인 ‘정중동(靜中動)’의 힘이 세한도에 집약되어 있음을 이제야 아주 조금 느끼게 되었다. 세한도가 추사의 유배생활을 담은 내면의 사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까지 꽤 시간이 걸린 셈이다.
아름다운 공간이라는 코너를 준비할 때마다 “과연 아름다움과 공간이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움과 공간이 차지하는 무게에 대해 생각하다가 아름다움도 잘 모르겠고 공간도 잘 모르겠다는 다소 무책임하고 대책 없는 결론을 쉽게 내려버린다. 아름다움이 뭔가? 공간은 뭔가?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공간은 또 뭔가? 이런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지만 두레박 없이 우물물을 길어 올려보려는 것처럼 그 생각이라는 것이 자주 겉돌고 미끄러진다.
각종 매체를 통해 요즘처럼 가볼만한 곳들이 많이 소개되는 시대가 또 있을까 싶은데, 그 매체들에 소개되는 공간들이 아름다운 공간일까 생각해보면, 아름다움도 모르겠고 공간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만, 신발 밑창에 붙은 껌의 시커먼 흔적처럼 유쾌하지 않게 남는다. 풍광이 아름다운 곳, 멋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 맛나고 보기 좋은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곳, 이 모든 것이 하나로 결합된 곳, 과연 그 곳이 아름다운 공간일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거듭되나 그 무엇 하나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그런데 학창 시절 세한도에 대한 나의 느낌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세한도에 대한 나의 느낌도 오버랩 된다. 그러면서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공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어떤 것이 마음의 자루에 담기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고즈넉한 걸음이 숨 쉬는 길
서울의 북촌이라 불리는 지역 가운데, 행정 구역상으로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가면 ‘별궁길’이라 이름 붙은 길이 있다. 북촌의 이름난 길 중 하나인데, ‘삼청동길’이나 ‘감고당길’, ‘가회로’에 비해 사람이 적고 한적한 길이다. 요즘 삼청동, 가회동이 워낙 떠서 주말에만이 아니라 주중에도 많은 관광객과 방문객으로 붐비는데, 별궁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고 북촌 특유의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이유라면 다른 길들은 그 길 자체가 방문객들의 목적지인데 반해, 별궁길은 목적지가 아닌 경유지로의 기능을 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또한 덜 상품화된 길이라는 이유도 거기에 포함된다.
이 별궁길에 들어서면 초침의 소리가 느려지고 현저히 작아진다. 걸음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강박관념의 게이지가 떨어진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방법 중에 신비와 고요의 길을 걷는 방법이 만약 있다면, 현대인들의 마음을 치유해줄 서울 도심 속 으뜸으로 손색이 없는 길이다. 그 길이라고 해봐야 500m가 채 될지 모르는 길이지만 말이다.
가회동에서 길을 건너 별궁길 입구에서 시작해 사적 제438호로 지정된 윤보선가(家)의 돌담을 끼고 안국역 1번 출구 방면으로 조금 내려오면, 높이 솟았으나 위압적이지 않은 교회당 하나를 만난다. 내년이면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안동교회다. 윤보선가 정문과 별궁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안동교회는, 1980년 재건축을 하여 100년 전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현재 교회당의 모습이 주변 북촌의 미관을 해치지 않고, 바로 옆 덕성여고의 옛 건물과도 조화를 이뤄 꽤 멋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넓지는 않으나 별궁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위해 푸르게 우거진 나무와, 앉아 잠시 여유를 가질만한 벤치로 쉼터를 마련해놓은 것도 안동교회가 가진 넉넉함이다.
교회가 개방한 단아한 한옥 별채
안동교회 옆에는 작은 한옥 별채가 하나 있다. 안동교회가 깨끗하게 리모델링을 하여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공간으로 개방한 한옥인데, 교인들에게 당호를 공모하여 얻은 이름이 바로 ‘소허당(笑虛堂)’이다. ‘성령의 은총을 힘입고 허심의 마음에서 즐거운 웃음을 웃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그 현판의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것이다. 물론 추사가 직접 그 현판을 쓴 것은 아니고 추사가 쓴 시구에서 그 글씨를 따와서 제작된 것이다.
작지만 단아하고 고즈넉한 ‘소허당(笑虛堂)’에서는, 화요일에는 단전호흡 강좌가 열리고, 목요일에는 퀼트 강좌가 열린다. 모두 북촌의 지역사회를 위한 열린 강좌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인들의 사랑방으로 개방된다. 별궁길을 걷다가 소허당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전통문화 한옥을 체험함과 동시에, 무료로 제공되는 전통차를 마시며 북촌의 분위기에 깊이 젖어들게 된다. 요즘 도심 속에서는 잘 맛볼 수 없는 특별한 문화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허당의 안채에 앉아 무심히 별궁길을 내다보면 추사의 세한도에서 느꼈던 ‘정중동’의 묵직함이 전해져 온다. 불현듯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 분이 주시는 삶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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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2009/01/14 1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별궁길 가는데..
너무나 멋지네요. 꼭 들려봐야겠어요.. ^^
지금 밖에 무지 추운데,
채비 단단히 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즐거운 나들이 되시고,
다녀오셔서 소감도 <오늘> 독자들과 함께 나눠주세요.